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도조 히데키 (문단 편집) === 당대 === [[파일:external/apwh.pbworks.com/Tojo3sdssssssssssss.jpg]] 이 사람에 대한 주변인들의 증언은 어떤 면에선 정말 천차만별이라 이 사람을 이해하는 데에 방해가 된다. '''지나친 [[완벽주의자]]''', '''[[면도날]]''' 같은 별명이 있는가 하면 '''"맘씨 좋은 [[할아버지]]라 가을에 날씨 좋은 날을 골라 동네 아이들을 불러 모아서 [[운동회]]를 열고 [[과자]]를 나누어주었다."'''는 말도 있다. 후자의 경우 손녀인 [[도조 유코]]가 한 말이지만, 밑에 서술한 사병들에 대한 처우를 보면 이 부분은 사실일 가능성이 높다. 믿음직하거나 훌륭한 군인과는 3만 8천리 정도 떨어졌으며 정권을 잡는 정치적 능력은 제법 뛰어났으나, '''국가를 이끌어나가는 [[정치가]]'''로서의 능력은 형편없었다. 그냥 권력 강화하고 자기 이득이나 챙기는 전형적인 악질 [[독재자]]였다. 사실상 그냥 '''막장.''' 그 유명한 무능의 대명사 [[무타구치 렌야]]를 '''심복'''으로 쓰고 직속 상관으로부터 '''"이놈은 쓰면 안 됨."'''이라고 평가받던 [[츠지 마사노부]]를 인재라고 격찬까지 하면서 등용할 안목이었으니 말 다했다. '''[[파시스트]]'''라는 점을 빼고 봐도 '''그냥 개막장이다.''' >그의 수기에서 발췌 > >"싸움은 최후의 한순간에 결정되는 법인데 일본 제국이 가지고 있는 힘을 십분 발휘해보지도 않고[* [[태평양 전쟁]] 문서를 읽어본다면 알겠지만, 이 시기 일본은 발휘할 힘은 커녕 본국에서 [[1억 총옥쇄]]같은 망상을 하고 있는 시기였다.] 적들의 선전책동에 휘말려 무릎을 꿇게 됐다." > >"적의 위협에 겁먹고 손을 들어버리는 내각 지도자와 국민의 얼빠진 정신을 믿고 전쟁에 나선 것은 개전 당시 책임자로서 깊은 책임감을 느낀다." > >"[[원자폭탄|신폭탄]]에 움츠러들고 [[소련]]의 [[만주 작전|참전]]에 움찔해 무조건 항복하면 국민의 전투 의사는 급속히 사그라진다. 이런 사태는 군의 통수 지휘에 지대한 혼란을 일으켜 전투력을 저하시킨다." > >"동아시아와 일본의 보호를 위해 많은 군인과 국민이 희생했는데 끝을 보지 못하고 섣불리 화평을 맺는 것은 적에게 종속되는 길." 나라가 망하는 지경에 이르렀는데 지도자라는 자가 자신 잘못이라는 말도 안하고 정작 남 탓을 하다가 죽었으니 지도자로써는 영 아니였던 양반임은 분명하다. 이쯤이면 태평양전쟁터로 가서 개죽음을 당한 일본인들이 불쌍하다. 히데키의 조카, 즉 남동생의 아들도 육군 [[장교]]였는데, 하루는 백부의 집을 방문했다가 하녀와 담소를 나누었다. 이 모습을 보고 갑자기 '''조카의 뺨을 때리면서''' "이놈이 체면도 없이 여자한테 정신줄 놓고 뭐하냐?"라고 야단을 쳤다고... 그러나 진짜 이 하녀를 진심으로 사랑하게 된 건지 우습게도 나중에 도조 사후 이 조카는 '''그때 담소를 나누던 하녀와 결혼했다.''' 그래서 히데키의 남동생과 그의 아들(= 위 문단에 언급한 조카)은 도조와 의절하였다. 어느 정도였냐면 남동생은 형의 사형 선고에 매우 고소해했고 [[야스쿠니 신사]]에도 일절 안 갔으며 그의 아들인 조카는 반(反) [[극우]] 인사가 되었다. 게다가 부하들이 옥쇄를 준비하자 '''"안경 쓴 바보 두 마리[* 도조와 [[쇼와 덴노|히로히토]]]들을 위해 아까운 니네 목숨을 날리지 마라"'''라고 했다. 바꿔 말하자면 '''천황에 대한 충성심이 전혀 없었다는 말이다.''' 자기 집안과 악연이 있던 과거 [[조슈 번]], 즉 [[야마구치현|야마구치]] 출신들을 싫어해서[* 여기는 과거 조슈 번이었다. 조슈 번과 도조의 악연은 부친 대에서부터 이미 예고되어 있었다. 이곳 출신 파벌이 육군을 가득 채우자 부친 도조 히데노리가 [[야마가타 아리토모]] 전 총리에게 "초슈만 편애하지 말고 고루 등용하셈." 소리를 했다가 쵸슈에게 제대로 찍혀서, 제1기 육군대학을 수석으로 졸업한 수재씩이나 되는 사람이 [[러일전쟁]] 중 여단장으로 전투에 참가했을 때의 실수를 초슈 파벌에게 트집잡혀 한직으로 맴돌다가 퇴역당했다.] 육군대학 면접관으로 재직시에 야마구치 출신 수험생들에게 '''"귀관이 면접 장소까지 걸어오는데 몇 보였나?", "본교 화장실의 변기는 모두 몇 개인가?"''' 등의 어이를 [[안드로메다]]로 관광시키는 질문을 하여 '''다 떨어뜨렸다.''' 그러나 1920년대 말에서 30년대의 일본 육군 내 분위기는 반초슈벌이었던지라 도조가 아니더라도 야마구치 현 출신들은 어차피 육대 입학이 좌절될 수밖에 없었다. 이 모두가 군 내에 강력한 파벌을 만들어버린 [[야마가타 아리토모]] 탓이지만. 위 주석에서 기술했듯 도조의 부친이 야마가타 총리에게 그렇게 간언한 이유도 그것 때문이었다. [[일본 내각총리대신|총리]]로 재임하던 시절 [[도쿄도|도쿄]]를 시찰하면서 사람들이 [[쌀]]을 낭비하는지 확인한답시고 하수구를 살펴보면서 쌀이 몇 알 떨어졌네, 낭비하네 떠들어서 사람들의 어이를 털었다는 일화도 있다고 한다. 그는 연대장 시절 부대 취사장 쓰레기통을 뒤져 음식물 쓰레기가 나오자 음식이 맛없기 때문이라고 결론내렸다. 수상이 된 이후에도 마찬가지였는데 뭐만 하면 시찰하면서 쓰레기나 하수구를 뒤지면서 뭔가 의미 부여하는 것을 좋아했다. 총리씩이나 되는 직위에 있는 이가 할 짓이 아니라는 지적에는 신경도 쓰지 않았다. [[태평양 전쟁]] 말기에 절대 국방권은 도서 지역 확보를 거친 비행장 건설로 할 뿐 삽으로는 이룰 수 없다며 도조의 전략을 대놓고 디스한 [[신문]] 수석[[기자]]를 '''자기 명령으로 [[일본 제국 육군|일본 육군]] [[이병]]으로 징집해 당시 격전이 벌어지던 [[이오지마]]에 보내서 죽이려고 했다.''' 그러나 중간에 [[일본 제국 해군|일본 해군]]에서 이 기자를 육군 입대일 하루 전 날짜에 징병[* 전쟁 이후 해군도 징병권을 행사할 수 있었다. 또한, 육해군 모두 징집 영장이 나왔다 해도 자기가 징집된 군과 다른 군으로 지원해 입대해버리면 징집 영장은 무효가 되었다.]하는 식으로 데려가 버려서 그는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. 당연히, 해군은 그 기자를 말단 [[수병]]으로 죽게 냅두진 않았고, 종전시까지 [[정훈(동음이의어)#s-2|정훈]] 업무에 종사시켜 종전 시까지 살아남게 해 줬다. 자세한 내용은 [[죽창사건]] 항목 참조. || [youtube(WoEb03tzwxs)] || [[파일:attachment/a0109941_498aef703b6cf.gif|width=100%]] || 전범재판소에서 [[오카와 슈메이]]라는 극우사상가도 전범으로 기소되었는데, 재판장에 잠옷(...)을 입고 출두하거나, [[도조 히데키 뒤통수|재판정에서 도조 히데키의 뒤통수를 때리는]] 등 이상한 행동을 해 정신이상으로 실형을 면했다. 그가 말년에 [[쿠란]]을 [[일본어]]로 완역했으니 정신이상은 실형을 면하기 위한 연기였을 가능성이 크고. 실제로 연기였다. 이 연기로 실형을 면해 천수를 누렸고 1956년 사망했다. 죽을 때 연기였다고 유언을 남겼다고 한다. 다만 죄질이 워낙 약해 실제 기소됐다 해도 중형이 나왔을 가능성은 없다.[* 그런데 정작 맞은 도조는 놀란 다음 뒤에 누군지 확인하고 그냥 웃고 치운다. 마치 친한 친구가 자기에게 장난으로 그랬다는 듯이 말이다.] 《불량지식의 창고》라는 책에 따르면 도조 히데키는 단 것을 좋아해서 그의 치아 상태는 군대 상태보다도 훨씬 나빴다고 한다. 체포 당시 치아 전체를 틀니로 바꿔야 했을 정도. [[아돌프 히틀러]]도 단 것을 좋아해서 치아가 성치 않았다는데 나쁜 놈은 서로 닮아가는 듯. 실제로 히틀러와 도조는 둘 다 당분 [[덕후]]였다는 점뿐만 아니라 의외로 세세한 부분까지 닮았다. > * 집권 능력 우수[* 정권을 잡는 능력만 우수할 뿐 그 외 정치가로서 능력이 우수하다는 말은 아니다.] > * 효과적인 선제공격 > * 과도한 전선 확장 > * [[소련군|물량 공세]]에 [[미합중국 해군|역전 당함]][* 거기에 더해 물량을 우습게 보고 정신력을 과대평가하는 버릇이 있다.] 또한 단순히 동맹 관계인 것을 넘어서 두 사람은 개인적으로도 서로를 매우 좋게 평가했다. 실제로 만난 적은 한 번도 없었지만 히틀러는 도조를 환상의 파트너이자 든든한 동맹으로 여겼고, 도조 역시 히틀러를 '친구'라고 칭할 정도로 좋게 생각했다. 그야말로 천생연분... [[미합중국 육군|미 육군]]에 파견되어 근무하던 [[미합중국 해군|미 해군]] [[군의관|치의관]] 조지 포스터(George Foster)와 잭 맬러리(Jack Mallory)는 도조의 [[틀니]]를 만들라는 지시를 받고 이 유명한 환자에게 장난을 치기로 작당했다. 그들이 만든 틀니는 아주 잘 맞았지만 거기에는 [[모스 부호]]로 '''"[[진주만]]을 기억하라"'''는 [[http://mentalfloss.com/article/71124/american-dentist-who-drilled-secret-message-tojos-dentures|문구를 새겼다.]] 도조 히데키는 1920년초에 독일에 파견된 적이 있었다. 독일에서 근무하면서 당시 독일군이 고안한 총력전을 준비하기 위한 전체주의적 베어슈타트(Wehrstaat, Defense State)개념에 크게 감명을 받았다.[* 이는 훗날 일본의 국방국가 개념으로 일본에 도입된다.] 또, 독일 근무 중 바덴바덴에서 다른 육군장교들과 인사쇄신과 군제개혁을 단행하여 군의 현대화와 국가총동원 체제의 확립, 마사키 진자부로·아라키 사다오·하야시 센주로 등의 옹립, 육군내 조슈벌 타도, 각 기의 유능한 동지 획득·결집 등 육군 개혁과 만몽문제의 조기해결, 혁신운동의 단행을 맹세했다고 한다. 이들은 훗날 육군 주류 파벌인 초슈, 사쓰마 파벌을 몰아내기로 맹세한다. 이것을 '''바덴바덴의 밀약'''이라고 하는데, 이들은 훗날 고급장교로 육군의 주류를 차지한 뒤에는 [[황도파]]와 [[통제파]]로 나뉘어서 격렬하게 대립하게 된다. 아이러니하게도 1922년 근무를 마치고 귀국하면서 딱 한 번 [[미국]] 여행을 한 적이 있었다. 당시 미국인에 대해 [[광란의 20년대|'돈, 성, 와인, 파티에만 찌든 물질주의에 물든 나약한 놈들']]이었다는 인상을 받았다고 한다.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